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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학이야기

'한국의 슈바이처', 성산 장기려 박사님에 관하여-

by 와썸_ 2009. 12.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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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나라 근현대사는 비록 암울한 시기들도 많았지만 
역시나 그 속에서도 빛나는 분들이 많이 계시다는 걸 느낍니다. 
몽양 여운형 선생님이시라든지, 여러분들이 계시지만
그 중에서도 '한국의 슈바이처'라고 불리던, 아니 개인적으로는 더욱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성산' 장기려 박사님에 대하여 얘기할까 합니다. 

다음 백과사전에서 검색한 간단한 약력입니다.
1932년 경성의학전문학교를 마치고 일본 나고야대학[名古屋大學]에서 의학사학위를 받았다. 1950년에 월남하여 6·25전쟁중 발생한 전상자와 극빈환자에 대한 무료치료를 시작으로 인술을 통한 인간애를 실천해왔다. 1951년부터 무료진료소인 복음병원 원장으로 일했고 그뒤 1953년부터 20여 년 동안 부산대학교 의과대학 및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부산 복음간호대학, 가톨릭대학교 의과대학 등에서 의학을 가르쳤다. 1968년에는 국내 최초로 의료보험협동조합인 '청십자운동'을 창시하여 가난한 환자들을 구제했다. 또한 1976년 한국청십자사회복지회, 1985년 장애자 재활협회 부산지부를 창설해 영세민과 장애인의 복지향상에 힘썼으며, 간질환자 치료모임인 장미회, 생명의 전화 등 사회봉사단체를 창설·운영하는 등 평생 사회봉사와 의료사업 발전에 헌신했다. 한국청십자사회복지회 대표이사를 역임했다. 대통령상, 국민훈장 동백장과 1979년 막사이사이상(공익봉사 부문)을 받았다. 

일명 '바보의사'라고 불렸다고 하십니다. 
일제 강점기 시절 독보적인 외과의사였던 백인제 박사의 수제자였으며 
그 스스로도 간엽 절제술 최초 시행 등 간의 대가이시면서도
신실한 크리스쳔으로써 환자만을 위해 살겠다는 생각에 평생을 자신의 월급까지 환자들을 위해 쓰실 정도로 
대단하셨던 분-

EBS의 지식e채널 및 몇권의 책에서 다루어지긴 했지만
아직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하기에 이렇게 글 올려보았습니다.

그 분의 선행에 관해서는 워낙 많은 에피소드들이 있는지라-

기려 박사님은 살아 생전 로맨티스트로도 유명하셨습니다.
아드님과 월남하셨지만
6.25 당시에 사모님과 다른 자식들은 애석하게도 못 내려왔기 때문이죠.
평생을 사모님에 대한 예의로 재혼하지 않고 환자보기에만 전념하셨던 장기려 박사님-
당시 90년대 들어 남북관계가 호전되면서 이산가족상봉 명단에 들어갔지만 자신만 혜택을 볼 수는 없다고 가지 않으셨습니다- 단 며칠만 볼 것이라면, 그것도 다른 사람들보다 혜택을 받아가며 볼 수 는 없다고. 
북한에서는 일부 선전체제용으로 사모님과 다른 자식들의 영상편지를 띄워 
장기려 박사님이 월북하도록 종용하는 데 사용하여 더욱 가슴에 못을 박았습니다. 
-부산 송도에 복음병원의 초창기 모습, 전후 어려운 시대라 열악한 환경이 눈에 띕니다.-

살아 생전에도 이별 전 아내가 불렀던
'물 밑에 선 봉선화야'를 자주 부르셨던 장기려 박사님.
사모님이 남편에게 보낸 음성 편지도 정말 애절했습니다.
밑에 링크가 KBS에 방영되었던 다큐멘터리인데 가장 잘 만들었던 것 같아서요.

마지막,  남북관계가 나아지면서 혹시나 가족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란 희망은
북핵문제가 다시금 불거지면서 수포로 돌아갔고 애석하게도 장기려 박사님은 뇌졸중을 맞아
95년 성탄절 날 돌아가셨습니다.

그의 선행은 다시금 남아 부산에, 전국에 여러 족적을 남겼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성산 장기려 기념 사업회-
그 분의 선행을 받들어 개도국에 의료봉사라든지, 북에 의료물품 제공 등 다양한 봉사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성산 장기려 박사님이 생전 일하셨던 복음병원. 정말 규모도 컸지만 요즘은 사정이 많이 안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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